진심과 진심이 통하는 순간

진단검사의학과 문선경


진심과 진심이 통하는 순간

오늘도 어김없이 핸드폰 알람이 오분 간격으로 울린다. 새벽 여섯 시에 일어 나는 것이 만 10년 째 인데도 알람 없이는 제대로 눈을 떠 본 적이 없다니...무거운 몸이 나의 일상의 고단함을 증명 해주는 듯 하다. 잠들어 있는 아이들에게 옷을 입히고, 쉐이커에 급하게 만든 생식을 남편과 나눠 마시고 나니...
벌써 출근 시간이 임박했다. 남편과 나의 등에 잠든 채로 업혀 있는 아들들과 목에 걸려 있는 어린이집 가방들로 엘리베이터는 이미 만원이다.  어린이집에 아이들을 눕혀 놓고 다급히 문을 나서려는 순간,
막내 아들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린다. " 엄마~~빨리 와~~" " 응.. 응..그...그래..." 그러고 나서야 나의 본격적인 출근은 시작된다.  
 
 근무 복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망 안으로 힘껏 집어 넣으면서, 나는 드디어 가정 주부의 모드에서 삼성  서울 병원 채혈의 神(드라마 '직장의 神' 인용^^) 모드로 변신한다.
 "딩동~" 병원에서 제일 먼저 업무를 시작하는 채혈실의 접수 벨 소리가 유난히 조용한 복도를 울린다. 오늘도 이미 많은 환자분 들이 새벽부터 채혈실 업무가 시작되길 기다리고 계신다. 왜 이제 서야 시작하는 거냐며 할아버지 한 분이 버럭 소리를 지르신다. 한 껏 미소를 지으며 어르신을 달래보지만 오늘도 녹녹치 않은 하루가 예상되는 순간이다. 카페인보다 더 짜릿한 긴장감으로 잠이 확 달아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나도 모르게 환자분 들께 가장 많이 상처를 받는 순간이기도 하며...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다른 편의 환자분 들께 시선을 돌려본다. 발걸음 소리조차 들리지 않으시는 분들... 화가 나도 소리지르며 화내시는 것 조차 엄두를 내시지 못하는 분들...얼굴 빛이 남들과 달리 어두우신 분들...언제나 두건이나 모자를 쓰시는 분들...바로 항암 치료로 몸과 마음이 지치신 분들이시다.
 
 "선생님...저희 엄마 채혈 좀 부탁 드릴게요..." 무뚝뚝해 보이는 젊은 청년이 나에게 쑥스러워 하며 말을 건넨다. 항암 치료로 앙상해지신 어머님의 팔을 보니 마음이 갑자기 슬퍼진다.
 "어머님...제가 안 아프시게 잘 할게요." 그제 서야 어머니는 마음을 여신다.
 "내가 마흔에 남편 저 세상 보내고 아들 둘 다 키워서 유학까지 보냈는데...이제 병이 왔어...병이..." 한 평생 헌신적으로 사셨던 어머님들의 인생이 너무나 서글프게 느껴지고, 그녀들의 고귀한 사랑과 헌신의 마음에 숙연해지는 순간이다.
 
 "슨생님...우리 아..아부지 피..피 검사 유..." 언뜻 보아도 몸이 많이 불편해 보이는 아들이 진료카드를 불안한 손으로 내민다. 절뚝거리며 뒤따라 오던 할아버지가 아들에게 한마디를 건네신다.
 "내가 더 잘 한당께...그렇게 집에 있으라고 해도 따라 나서...몸도 성치 않은 것이..."  
먼저 온 아들이 온몸을 비틀며 씩~ 웃는다. 웃는 모습이 대한 민국 여느 유명 배우와도 비교가 안될 정도로 멋있다. 대한 민국 어느 보디가드가 이 보다 더 든든하랴!!! 아버지를 생각하는 그의 사랑에 또 한 번 마음이 뭉클해진다.
 
 " 빨리 빨리 피 빼 줘~~~""아버님!!! 수납을 먼저 부탁 드릴게요!!!"
 " 내가 이 병원에 돈을 얼마나 냈는데 싸가지 없이 말대꾸야~~~"
 환자분의 고성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다. 다른 환자 분들도 긴장하기 시작한다. 외래 채혈실 근무에 이골이 난 나에게도 가장 난감한 상황이며, 아무리 경험해도 적응이 되지 않는 순간이다. 환자 분을 잘 달래고 채혈을 무사히 마치고 나니, 환자 분께서 멋쩍은 표정으로 말씀하신다.
 "아가씨, 피 한 번 잘 빼네!!! 내가 이 병원 개원 할 때부터 다녔는데, 내가 심장 수술을 해서 혈관이   
 없어...어찌나 쑤셔 쌌는지...내가 노이로제 걸렸어..." "그러셨구나...아이구...고생 많으셨네요..."
 나의 맞장구 한마디에 아버님의 표정이 눈 녹듯 부드럽게 변하셨다. 이럴 때마다 아까 소리지르시던 그분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환자 분들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직원들의 무의식적이고 순간적인 표정, 목소리, 말투 등으로 인해 화가 나시는 분들이 대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블랙 리스트로 인해 환자를 처음 대할 때부터 색 안경을 끼고 대하는 것을 환자 분들도 느끼시는 것이 틀림 없다는 생각이다.
 " 어이구, 이젠 아가씨한테만 채혈해야겠어~~" " 네, 아버님~~다음에도 제가 꼭 한 번에 채혈 해드리겠습니다!" 이렇듯 우리를 힘들게만 한다고 생각했던 환자들이 오히려 한 번 두터운 신뢰가 쌓이게 되면 단골 고객이 되신다. 결국 불만 고객과 충성 고객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사실을 현장에서는 항상 느낄 수 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흡사 김연화를 닮은 이쁜 소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김없이 소녀의 어머니도 항상 뒤따라 들어오신다. 하얀 얼굴에 해맑은 미소를 가진 소녀와 노란 긴 머리가 너무나 잘 어울려 전혀 가발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오랜 항암 치료로 인해 마네킹처럼 혈관이 다 숨어 버린 그녀의 손에는 바늘을 찌른다는 사실이 더 미안할 정도이다. 그래도 언제나 그 소녀는 신세대 다운 기지를 발휘한다. "아~~오늘 블랙 데이 예여~~이런 날 병원에 오다니...남친 없어서 짜장면 먹어야 되여~"   
 그녀보다 더 마음이 아플 엄마의 아픔을 속 깊은 그녀는 항상 이런 식으로 위로한다. 묵묵히 뒤에서 딸을 위해 기도하는 그녀의 엄마를 위해 씩씩하게 생활하는 그녀!!!
 항상 감사보다는 불만을 먼저 내세우는 건강한 우리 직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사랑스러운 그녀를 우리는 진심으로 좋아하고, 또 진심으로 응원한다.   
 
 저기서 두 손을 꼭 잡은 노부부가 채혈실 쪽으로 걸어오신다. 한 평생 같은 길을 걸어오신 두 분의 모습은 흡사 피를 나눈 형제처럼 꼭 닮아 있다. 항암 치료로 두건을 쓰신 모습도 참 이쁘다며 자랑을 하셨던 아버님을 뵐 때 마다 마음 한구석이 많이도 아팠다. 어쩌다 부부싸움을 한 다음 날 이 두 분을 뵐 때면, 나의 마음에 꼭 필요한 약을 처방해 주시는 듯하여 한참을 쳐다보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환자 분께서 휠체어를 타고 오시기 시작하셨다. 휠체어를 미시는 아버님의 굽은 허리가 마음을 대변하는 듯 더욱 힘겨워 보였다. 그리고 한동안 우리는 아름다운 노부부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아가씨... 우리 집사람... 하늘나라 갔어...그 동안 참 고마웠어...그런데 이제 내가 그 병에 걸렸대..."
 오랫 만에 찾아오신 아버님의 눈을 차마 우리는 쳐다볼 수 없었다. 채혈하는 내내 눈물이 계속 흘러서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묵묵히 아버님의 손을 잡아 드렸다. 부부란 서로를 묻어 주기 위해 존재한다는 옛 시인의 시구가 떠오르는 가슴 아픈 순간이다. 건강한 남편이 너무나 감사한 순간이다.       
 
 나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여자분께서 두 눈이 빨개지셔서 채혈실로 들어오신다. 나는 아무런 말도 못 건네고 두 손을 잡아 드리며 묵묵히 채혈을 하고 나서 밴드를 붙여 드리며, 힘내시라는 말 한마디 밖에 할 수 없었다. 환자 분은 고개만 끄덕이시며 다시 아무런 말씀도 없이 나가셨다.
 얼마 후 그 환자 분께서 작성해주신 장문의 칭찬 카드가 채혈실로 도착했다. 어린 아이들이 있는 나와 같은 30대 주부인 그녀는 대장암 진단을 받고 실의에 빠져 있는 상태에서 채혈실을 내원하셨다고 한다.
 그 때 채혈을 하면서 잡아 드렸던 직원의 손이 너무나 따뜻했다고 하시며, 본인이 그토록 부정하고 싶었던 암이라는 사실을 조금씩 인정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암이라는 놈을 이겨낼 수 있을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드셨다는 것이다.
 우리의 사소하고도 작은 친절이 환자 분께는 이렇게 큰 힘이 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순간이였다. 한 분 한 분께 최선을 다해 진심으로 다가갈 것을 다짐하는 순간이였다.
 
  "우와~~진짜 하나도 아프지가 않네!!!"
  "칭찬 카드 어디있어요?"
  "내가 십 년 동안 채혈했는데 이렇게 안 아픈 적은 처음이야~~바늘 들어가는 느낌도 안 들어요!!!"
  "오늘이 항암 마지막 날이야~~그 동안 너무 고마웠어~나 혈관도 없는데...덕분에 잘 끝났어~~"
 채혈실을 방문해주시는 환자분 들께 하루에도 몇 번씩 듣는 칭찬의 말씀들은 들어도 들어도 너무나 즐겁고 정겹다. 채혈실에서 근무하는 동료들에게는 그 어떤 선물과도 비교가 안 될 가장 소중하고 값진 선물이다. 절로 어깨가 으쓱해지고 미소가 지어지는 가장 보람찬 순간이다.
 
 우리 암 병원 채혈실의 바쁜 하루가 마무리되어 간다. 오늘도 환자들을 통해서 상처도 받았고, 환자들을 통해서 그 상처가 치유됨을 느꼈다. 마치 연애의 상처는 연애로 치유하듯...그 치유를 통해 더 큰 사랑을 깨달았고, 인생에서 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나는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Healing이라는 것이 꼭 거창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환자와 병원 직원의 관계를 떠나서 진심과 진심이 통하는 순간, 바로 그 순간이 Healing time이지 않을까?
 그 감사의 에너지를 고스란히 나의 가족들에게도 전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오늘도 퇴근 버스에 올랐다. 고달픈 워킹맘은 퇴근 버스에서 저녁 메뉴를 잠깐 고민하다, 순식간에 잠에 빠져 들겠지만...
 
 오늘도 나는 삼성 서울 병원에서 인생을 배웠다. 오늘도 나는 진정한 사랑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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