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전공의 생활을 하다가 보면 업무에 쫓겨 목적 없이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보내기 쉽다. 스스로에게 어떤 의사가 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아도 허공에 떠다니는 구름을 잡는 것처럼 구체적인 대답은 좀처럼 얻기 힘들다. 바쁜 생활에 익숙해져 일상이 되어버린 이 시점에 전공의 해외 연수의 기회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2008년 5월 한 달간 미국의 Cleveland clinic에서 연수를 하며 얻은 것과 느낀 점들,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이야기 하려 한다.
Cleveland clinic에 대하여
미국 Ohio 주 Cleveland city에 위치한 Cleveland clinic은 1921년 개원하여 심장 질환에 대해 미국 내 최고 병원으로 알려져 있다. 그뿐만 아니라 2007년 U.S. News & World report에 미국을 이끌어가는 4대 병원 (four leading hospitals in America)에 선정될 만큼 다른 분야에도 의료 선진을 주도하고 있다. 신경외과 분야에서도 미국 내 6위에 선정되었으며, 2005년 세계 최초로 spinal surgery에 surgical robot을 도입하였고, 2006년 정신질환에서 deep brain stimulation을 적용하여 선구자적인 성공을 거둔 바 있다. 해외 연수 병원을 선택하기 위해 여러 곳을 검토하던 중 Cleveland clinic을 선택하게 되었고, 이곳 Brain tumor institute, Neurological Surgery에 Staff으로 계신 이정훈 선생님께 부탁을 드려 연수의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철저한 환자 중심의 외래 진료와 의료 행위
미국 의료를 참관하면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의료 행위의 모든 주체가 의사가 아닌 환자를 중심으로 진행된다는 것이었다. 삼성서울병원도 환자 중심의 진료에 앞장선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미국 의료와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외래 진료를 예로 들어보면 환자가 의사를 만나기 위해 외래를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외래를 방문한 환자를 만나기 위해 의사가 환자를 찾아가는 개념의 차이였다. 예약된 시간에 환자가 외래를 찾아와 의사가 앉아있는 진료실에 순서대로 들어와 진찰을 받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진료실에 환자와 보호자가 함께 들어가 있으면 의사가 자신의 환자가 있는 외래 진료실을 각각 방문하여 환자를 진찰한다. 진찰 시간도 시간에 쫓겨 5분도 채 안되어 다음 환자를 봐야 하는 것과 달리 재진 환자는 30분에 걸쳐, 신환의 경우 1시간까지 설명을 해주기도 한다.
또한 환자가 노인 또는 어린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수술이나 치료 계획에 대한 설명은 환자에게 직접 하고 그 결정은 환자에게 하도록 한다. 손자의 졸업식 날짜나 환자의 집과 병원 거리 같은 사소할 수 있는 사항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환자에게 모든 치료 계획의 스케줄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준다. 물론 결정 역시 외래 진료 시간 내에 하는 것이 아니라 집에 돌아가 충분히 상의를 한 후 의사에게 전화를 하거나 E-mail을 보내도록 교육하고 있었고, 이후 검사결과나 변동사항이 있으면 다음 외래에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병원에서 환자에게 연락하여 이후 치료계획에 대해 알려준다. 한국에서 이런 외래 진료가 가능하려면 시간과 공간, 정책적인 측면이 모두 뒷받침되어야 하겠지만 치료의 주체가 환자라는 사고의 전환은 반드시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진의료 시스템에 대해
미국 의료에 가장 놀란 사실 중 또 다른 한가지는 환자가 수술 당일에 입원한다는 것이다. 수술 전 처치가 입원하여 반드시 필요한 환자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환자는 수술 시간에 맞춰 교육받은 대로 금식을 하고 수술 당일 병원에 입원을 한다. 그렇게 수술 스케줄을 짜고 진행해도 58개나 되는 수술방 모두 지체 없이 바쁘게 진행되고 있었다. 또한 거의 모든 환자가 수술 후 2일째 퇴원을 한다. 집이 먼 환자들은 퇴원하여 병원 근처의 호텔이나 모텔에서 숙박하며 컨디션 호전 후 집으로 가기도 한다.
따라서 신경외과 수술 환자의 총 재원기간은 대부분 3일이다. 의사와 환자들 모두 입원은 병원 내에서 치료가 필요할 경우에만 한다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매일 환자들과 퇴원을 두고 실랑이를 하는 우리나라와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신경외과 환자들의 일반병실과 준중환자실에 해당하는 Neuro stepdown unit과 중환자실에 해당하는 Neuro intensive care unit 역시 모두 한 층에 위치하여 신경과 및 신경외과 환자들만의 치료 전달 체계의 동선을 최소화하고 있었다.
미국의 전공의 신경외과 전공의 생활
한국에서 신경외과 전문의가 되려면 인턴 1년 및 레지던트 4년을 거쳐야 한다. 미국에서는 인턴 1년을 포함하여 총 7년의 기간 동안 신경외과 training을 받아야 한다. 전공의 생활 중 가장 부러웠던 것은 당직 체계였다. 미국에서는 24시간을 초과하여 연속하여 병원 내에서 근무해선 안된다. 따라서 당직 다음 날은 반드시 병원 밖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 전공의에게도 1주당 지정된 근무시간이 있어서 이를 초과하게 될 경우 해당 과에 불이익이 줄 수 있는 규정이 있다. 과중한 업무는 의료사고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환자들의 재원기간이 짧기 때문에 입원환자의 수가 적고, 대부분의 수술이 오후 4시 이전에 끝나기 때문에 이런 program이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문화적인 차이겠지만 attending이라고 불리는 staff 선생님과의 대화도 무척 자유로웠다. 우리나라에서 저런 식으로 얘기한다면 상당한 무례를 범하는 것이겠다 하는 경우가 매우 자주 있었다. Conference 때에도 레지던트들은 자유롭게 토론을 하고 자신 있게 Staff 선생님들의 의견에 반대되는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였다. Staff 선생님들도 이런 대화에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자기의 생각이 합당하다는 것을 동등한 입장에서 설명해 주는 모습이었다. 수술 중에도 이런 대화 방식은 예외가 아니었으며, 서로 존중하는 모습은 참관하는 입장에서도 바람직해 보였다.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나기 위해
삼성서울병원에서 몇 년간 일해오면서 타성에 젖어 익숙해진 것들만이 최고인 것으로 생각했었다. 사실 국내에서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우리 병원에서 전공의 생활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갖지 않는 것이 오히려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 머물러 있다면 말 그대로 우물 안 개구리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미국의 의료문화나 시스템이 모든 면에서 최고라는 것은 아니다. 의료 보험이나 돈이 없는 사람은 병을 알면서도 치료를 포기해야 하는 보험 문제뿐 아니라 인종 간의 갈등과 의료의 접근성 면에서는 오히려 의료후진국이라고생각할 정도로 문제점도 안고 있다. 병원의 PACS system이나 의료의 전산화는 Cleveland clinic보다 오히려 우리병원이 훨씬 더 앞서 있었다. 그러나 환자 중심의 진료 체계와 의사와 간호사, paramedical 사이의 존중하는 문화 및 합리적인 사고 방식은 분명 배워야 할 점이다. 지금 한국에서는 불가능하다라는 생각에서 분명 벗어나야 한다. 한국의 의료 체계와 의료 문화에 개선해야 할 점들을 하나하나 고쳐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이를 위해서 내가 이후 어떤 의사가 되어야 할지에 대한 윤곽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사고의 전환과 시야를 넓힐 수 있는 해외 연수에 감사하며 연수기를 마친다.